일터사역 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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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사역 43강

43 삶과 행동과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교회2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우리는 일터 사역을 포함한 선교적 교회를 살펴보는 중에, 신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선교적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목표나 자세를 가지고 듣습니까?

은혜 받기 위해 혹은 삶에서 도움이 도움이 되기 위해.

그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목적을 위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늘 말한대로, 하나님의 뜻, 얼굴, 비전.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였더라고요. 목회에서.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정확하게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이 정확하게 뭔지 그것을 배우기 위해 고민하고 애통하고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배우는대로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정확히 알아야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삶에 설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집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세 가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구약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십니다.

말세의 선물인 성령이 교회에 부어집니다.

물론 이 세 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삶과 행동과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신 삶을 살았고, 그것이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지난 주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2. 삶과 행동과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교회

 

교회는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그래서 교회도 예수님과 똑같이 삶과 행위와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는 구절이 마가복음 3:14-15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 사도를 세우신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핵인 새 이스라엘, 즉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우선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전도(말씀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2 사도를 세우신 목적이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신 것은 12 사도로 하여금,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을 똑같이 그대로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말씀과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에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이 부분은 먼저 12 사도가,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삶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도 예수님처럼 무엇보다 먼저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해야 합니다. 행위와 말씀을 통한 증거는 삶으로부터 나옵니다.

 

오늘 설교. 레슬리 뉴비긴이 본 선교적 교회의 모습을 대부분 참조한 내용입니다.

마이클 고힌의 교회의 소명이 이 부분을 가장 잘 정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이 레슬리 뉴비긴 본 선교적 교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하더라고 나누었다.

 

1)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교회

 

이 부분이 매우 중요. 이 부분이 핵심. 사역은 삶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그래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약.

열방에 복이 되기 위해 복을 받는 교회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 전시 백성.

선택윤리선교

반문화 대안 사회.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는 교회: 표지판과 예고편.

계속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도 바로 말씀드린대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삶과 행위와 말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행위와 말씀 사이에 불가분한 연결이 있음을 봅니다.(매우 중요. 성경에는 통합) 능력 있는 행위는 설명하는 말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둘 다의 기저에는 능력 있는 새로운 실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실재는 무엇인가? 복음의 대답은 예수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선교에서 능하신 사역과 말씀 선포는 예수님의 삶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실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예수의 지상 사역이 끝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새로운 삶에서 계속됩니다.

매우 중요

 

뉴비긴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삼중의 증언을 자주 지적합니다. 말과 행위와 공통의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

 

마이클 고힌은 레슬리 뉴비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세 가지를 관련시키는 방식에는 일관성이 있다. 성령의 새로운 실재의 임재는 공동체의 삶 전체에 현존하며 능한 행위들에 의해 입증되는데이는 결국 설명을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선포를 요청한다.71”

 

이것은 선교에 대한 뉴비긴의 견해가 가진 논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공동체의 총체적인 삶--모이는 공동체와 흩어지는 공동체--에 있는 성령의 임재로부터 행위들이 나오며그것은 결국 새로운 실재를 설명하는 복음의 말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우리는 그 행위들 속에 있는 교회의 증언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지난 주에 살펴본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마이클 고힌의 설명이 아주 이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어린 교회에 대해 묘사할 때, 세 가지 분명한 특징을 말한다. 첫째는 헌신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좀 더 많이 경험하기 위해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것, 기도에 헌신했다(2:42).(이 헌신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 결단, 결의, 힘을 다함) 둘째, 개인 구성원의 삶에서 그리고 전체 공동체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분명히 보여주는 표적들로(2:43), 서로와의 관계에서 드러난 정의와 자비로(2:44-45), 기쁘게 즐기는 것으로(2:46), 예배로(2:47) 알려졌다.(하나님 나라의 임재에서는 나온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 ) 셋째, 하나님 나라의 해방된 삶이 그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분명해짐에 따라, 하늘에 오르신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2:47). 이것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성경은 새로워진 이스라엘의 흡입력에 대해 묘사한다(60:2-3; 8:20-23). “민족들이 시온을 향해 가는 순례를 말하는 예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이스라엘에 나타난 구원에 매료된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선교 활동의 결과로 신자가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내뿜은 매력이 그들을 이끌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 초대교회는 외부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매력적인 백성, 매력적인 대안 사회) 신자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발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을 어둠에서 끌어냈다(참고 엡 5:8; 벧전 2:9).

 

2) 교회는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정의와 자비와 평화와 치유와 회복의 행위들과 말씀의 조화.

 

오늘날 선교 운동에서, 말씀의 우선권을 확언하는 이들과 정의 및 평화의 행위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다툼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 사이의 다툼입니다. 보편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은 말씀 선포에 우선권을 두고, 에큐메니칼 진영은 정의 및 평화의 행위를 우위에 둡니다.

 

그런데 레슬리 뉴비긴은 이 둘 다의 문제점을 아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구원의 올바른 성격을 토대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주의 진영의 잘못입니다.

뉴비긴은 이 논의를 구원의 본질이라는 맥락에 됩니다. 첫째, 구원은 회복적이고 포괄적이다. 그것은 개인들을 다른 세계로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모든 인간의 삶을 인간 외 창조 세계의 부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잘 지적합니다. 복음주의 전통에 속한 이들이 이것을 오해할 때그들은 그것의 회복을 위한 계획들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개별 인간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준비하거나 준비하지 않음에 따라 그에게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73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에큐메니컬 진영 잘못입니다.

둘째, 구원은 하나님과의 교제 및 정의와 평화에 대한 헌신 둘 다에 관한 것이다. 한편으로성경에서 구원은 전인 및 그의 관계성들의 총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사회적인경제적인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이런 구원의 시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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