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사역 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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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일터사역 44강

10장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과 역할을 이어 받습니다. 그런데 전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십니다. 신약의 교회는 그 구속에 토대한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가장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그 두 역사적 사건들은 우주적 역사의 중심에 함께 서 있으며, 역사의 목적인 구원을 성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다룰 내용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해 쓰여진 책들만 하더라도 그 분량이 매우 많습니다. 여기서는 교회의 선교적 성격과 관련한 한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교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죄와 악이 지배하는 옛 시대를 끝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서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행동하셨고, 옛 시대를 지배하던 악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서 역시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행동하셨고,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시대의 끝이고, 그분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새 창조의 첫 열매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악이 지배하는 옛 시대를 끝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죄와 악이 지배하는 옛 시대를 끝내셨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보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세 가지 이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 동안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개인 구원을 위한 대속적 속죄로만 축소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경우,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중요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어서 그런 관계를 가로막는 개인적인 죄의 문제로,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의 공로를 얻는 방법은 개인적인 믿음과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이러한 복음 제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이미지 중 대속적 속죄substitutionary atonement의 이미지는 십자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축소해서 이해하면, 개별적인 신자의 삶을 넘어서는 십자가의 중요성은 불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죄를 개인의 구원만을 위한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피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포괄적으로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모든 성경적 이미지를 인정하고, 십자가의 개인적•공동체적•우주적인 의미 전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속죄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는 희생제물의 이미지입니다. 희생제물의 이미지는 예수님이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를 스스로 담당하시고 걸어가신 대속의 길을 이야기하는 풍부한 구약의 상징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이미지로서 성경적 이해의 핵심입니다. 


속죄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는 승리의 이미지입니다. 승리의 이미지에서 십자가는 전투와 고난을 통해 악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이며, 그 결과로 해방된 것은 창조세계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이미지는 십자가의 의미가 갖는 우주적 범위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거두신 승리는 모든 창조세계를 오염시킨 죄와 악에 대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그것을 성경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렇게 하면 십자가에 대한 이 이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고힌 박사는 승리의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잘 표현합니다. 

“복음서는 한편으로는 예수님 안에 성령에 의해 임한 하나님 나라의 권능과, 다른 한편으로 악과 어둠의 세력들 사이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충돌은 예수님께서 고통, 질병, 죄, 개인적인 죄와 부도덕적인 생활 방식, 부에 대한 숭배, 깨어진 관계, 죽음, 자기 의, 적대적인 자연, 왜곡된 종교 구조와 관습, 배제시키고 소외시키는 불의한 사회 구조,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불의한 경제 구조와 권력을 남용하는 불의한 정치 구조를 공격하실 때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런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에 그분의 말씀, 능력 있는 행위, 많은 예언적 행동과 사회적 실천들로 대항하신다. 그분은 이 악의 근원을 인간의 마음(막 7:14-23)과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인 구조 뒤에 숨어 있는 악마적이고 사탄적 세력들(눅 22:53, 요 12:31)에서 찾으신다. 십자가는 이러한 전쟁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다. 모든 권력 구조一정치•종교•사회 구조一가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처형시킨다(고전 2:8). 이들은 잔인한 병사, 모호한 대중, 소심한 제자, 배신자 유다, 질투하는 종교 지도자, 부패한 로마와 유대 사법제도다. 복음서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십자가는 ‘악의 세력들과의 결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다.’10”(열방에 빛을, 214쪽)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악을 정복한 것은 강한 힘을 무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의 완전한 공격을 몸소 받으시고 죄의 힘을 소멸시키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 방식이 우리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고난, 거부, 죽음의 길一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분은 악의 힘들을 제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힘들의 완전한 무게를 본인이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통치를 증거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외견상 패배 속에서 승리는 이루어진다.”11 세상을 타락시키는 악과 죄를 극복하고 패배시킨 것은 바로 고난 받는 사랑의 강함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양은 죄책과 파괴적인 죄의 세력을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죄를 스스로 담당하십니다.


그 동안 이 두 이미지 사이의 극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희생재물의 이미지를 주장하는 반면, 에큐메니칼 진영 혹은 초교파주의 진영에서는 승리의 이미지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두 이미지는 서로 대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취할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다 인정하고 받아야 들여야 합니다. 두 이미지 모두 선교적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건들과 교회와의 관계, 그리고 교회의 목적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이미지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존 드라이버가 “원형적archetypal” 이미지라고 부른 이미지인데, 마이클 고힌이 그의 책, 『열방의 빛을』에서 이 부분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서에 나오는 이 원형적 이미지는 그 이면에 이스라엘의 집단적 개인(corporate personality), 곧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대표자가 되고 모든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다는 히브리적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이러한 대표자(롬 5:12-21, 고후 5:14-15)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운명만이 아니라 온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의 운명을 짊어지십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시고, 몸소 그들의 운명을 짊어지십니다. 


두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은 이러한 이해를 나타내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째 사람一아담一이 그의 불순종으로 옛 시대를 시작했지만, “둘째 아담"—예수님一이 그분의 순종으로 다가올 시대를 가져오셨다고 기록합니다. 바울 서신서에서 “육신flesh”은 죄의 지배를 받는 세상을 의미하고, “영Spirit”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제 회복된 세상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old man”은 옛 시대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이고, “새 사람new man”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변화된 인간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서 죄, 악, 사탄적 세력과 죽음의 지배를 받는 옛 시대를 끝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옛 시대의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옛 시대의 죄, 악, 사탄, 죽음의 세력은 패배한 적들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시대에 속한 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서 다가 올 시대를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 하반부(40-66장)에 나오는 세 종류의 종에서도 “원형적”인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하반부에서 종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사 41:8, 44:1, 2, 45:4). 그들은 불충한 종이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하반부에서 종은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사야 하반부에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 종의 노래가 네 개 나온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사야 하반부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대표자 혹은 온전한 이스라엘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구절이 이사야 49:3입니다.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종의 노래 중의 하나로서, 여기의 “너”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메시아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라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가 온전한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라는 말입니다. 닉키 검블 박사는 그의 책 『부흥의 본질』에서 이 점을 십자가를 옆으로 누인 모양을 사용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꼭짓점을 메시아인 예수님으로 표시함으로써,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임을 표현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 점을 이스라엘이 예수님에게로 흡수된다(merge)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림을 더 작게)


이스라엘

예수님

신약의 교회









이사야 하반부에는 또 한 종류의 종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닙니다. 그들은 복수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사야 53장 이후로 종은 더 이상 단수의 형태로 나오지 않습니다(63:17, 65:8-9, 13-15, 66:14 등 참조). The NIV Study Bible(Zondervan Publishing House)의 편집자들은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한 신실한 자들인 참된 신자들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한다(사 56:6-8을 보라). 그들은 한 편으로 그 종(사 53:10)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리인 신약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성경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예수님,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세 종류의 종으로서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세 종을 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만 대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 더 나아가 모든 창조세계를 대표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그들의 운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옛 시대를 마감하시고, 부활을 통해 새 시대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 창조 역사의 동역자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무리인 신약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다시 말해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회집하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를 위해서도 그리고 교회의 소명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에게 속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은 세 가지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첫 태생, 시작, 첫 열매입니다. 


첫 태생과 시작의 이미지는 골로세서 1:18에 나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첫 태생”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먼저 나신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첫 태생”(the first-born)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첫 태생”, 다가올 새 세상에서 태어난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러나 "첫 태생” 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나셨다는 의미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첫 태생”으로서 특별한 위치, 곧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시고,” “그들의 미래를 자신의 미래에 참여하게 하신” 분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근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시작(beginning)”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그 단어는 부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근본’이 된다 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페트라 주석). 헤르만 리더보스는 영어 단어 “beginning(시작)”은 성경이 의미하는 중요성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도하고 있는 바는 단지 그리스도가 연대기적 순서의 관점에서 첫 번째이거나 시작을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길을 연 선구자이자 개시자였다. 위대한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현실이 되었다.”31 (직접 찾자) 


세 번째 이미지는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이 부분은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예수님은 종말론적 추수의 “첫 열매”, 시작, 추수의 첫 부분으로서, 남아 있는 추수를 대표합니다. 첫 열매에서 전체 추수가 가시화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열매는 다가오는 추수의 확실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5장_그리스도의 죽음과부활,교회의 선교적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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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이미지 모두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에서 다가올 시대一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삶一가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성경 이야기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그것은 단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입증하는 하나의 기적으로서 홀로 서 있는 고립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 십자가와 함께 나란히 서서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어떤 일이 시작되었고, 그 일은 언젠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뉴비긴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역사적 사건이 모든 역사에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믿음이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 모두를 포함하는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추적•결정적인•단회적인once-for-all 사건이 서 있다. 인간의 상황은 이 사건으로 인해 불가역적으로 바뀌었다.” 32 (직접 찾아서)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시대의 끝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2.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취된) 죄의 패배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된) 새 창조의 시작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류를 창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침(세)례를 받고 예수님과 연합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대 속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 불가역적으로 성취된 우주적 역사의 운명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침(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로마서 5장과 6장에서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은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옛 세상의 시작으로 서 있지만, 예수님은 새 세상의 시작으로 서 계십니다. 아담의 죄는 옛 시대를 열었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다가올 시대를 여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옛 시대의 일부이며 그 시대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다가올 시대의 일부가 됩니다(롬 5:12-21). 이러한 대조 이후에 곧바로 성경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침(세)례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편입함으로써(롬 6:1-14) 예수님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하신 것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로마서 6장에서 말하는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전제합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시작이라는 말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시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한 핵심은 이스라엘의 회집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실체화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에 참여하는 백성을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속한, 예수님 안에 있는 무리를 창조하십니다. 


우리는 로마서 8:29에서도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 말 성경에 “맏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골로세서 1:18에서 “먼저 나신 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똑같은 단어로서 “첫 태생”(the first-born)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태생”이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는 “많은 형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한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후서 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선 이 구절에서 “피조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창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롬 1:20). (물론 그 단어가 때로는 “창조된 것”, 즉 “피조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롬 1:25). 그래서 리더보스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에 속한다.”33 할렐루야. 당연히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번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죄와 죽음이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갈 6:15).34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이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보다는 새로운 창조에 속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리더보스는 이 “새로운 창조” 이미지를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먼저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점이 아니라 구속사적이고 공동체적인 관점을 지향해야 한다.” 바울의 새 창조에 대한 언급은 “단지 개인적인 의미(새로운 생명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 창조의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38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새 창조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이야기할 때, 그는 “고립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사건으로의 연합은 개개의 신자를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동시킨다.”37고 말합니다. 


The New American Commentary에서.  이 부분을 리더보스의 주장을 잘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Garland, D. E. (1999). 2 Corinthians (Vol. 29, pp. 286–287).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Paul also never uses the noun “creation” (ktisis) to refer to an individual person (see Rom 1:2, 25; 8:19–22, 39), and the concept of a new creation appears prominently in Jewish apocalyptic texts that picture the new age as inaugurating something far more sweeping than individual transformation—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translation “there is a new creation” would mean that the new creation does not merely involve the personal transformation of individuals but encompasses the eschatological act of recreating humans and nature in Christ. It would also include the new community, which has done away with the artificial barriers of circumcision and uncircumcision (Gal 6:15–16; see Eph 2:14–16) as part of this new creation. Garland, D. E. (1999). 2 Corinthians (Vol. 29, pp. 286–287).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바울은 “창조”(크티시스)라는 명사를 개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전혀 없다(롬 1:2, 25; 8:19-22, 39을 보라). 유대교 종말론적 문헌들 안에 주되게 나타나는 새 창조의 개념은 개인의 변화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을 가져오는 새로운 시대를 그린다. 즉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피조물이다”(there is a new creation)라는 번역은 새 창조가 단순히 개인들의 개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과 자연을 재 창조하시는 종말론적 행동을 포함한다. 그것은 이 새 창조의 역시 일부로--할례와 무할례의 인위적인 장벽을 제거해 버린—새로운 공동체를 포함한다(갈 6:15-16; 엡 2:14-16도 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원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든지 무할례든지 아무 유익이 없고, 오직 새 창조)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세상 질서의 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리된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거주하는 새로운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새 창조에 속합니다. 


마이클 고힌이 잘 표현합니다 

교회는 다가올 시대의 능력 안에 참여하기 시작한 사람들, 곧 베커가 말하듯이, “새 시대의 여명으로서 교회”다. 교회는 그 자체로 “종말론적 지평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발현(proleptic manifestation)이다. 그것은 새 창조의 교두보이며 옛 시대 안에 드러난 새 시대의 표지다.”35 이러한 이미지들은 교회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롬 5:12-21 참조)의 사역에 참여하는 공동체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교회는 “새 인류”(엡 2:15, 골 3:9-11 참조)로서 그 구성원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서 살아가고(골 1:13), 현재에서 “다가올 시대”(히 6:5)의 능력을 경험하며, 이미 “안식”(히 4:9)을 누리기 시작했다.  

7장_선교적 교회에 대한신약의 이미지 

311


마르쿠스 바르트Markus Barth도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는 부활의 능력과 신앙의 살아 있는 증거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35 

오 주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5장_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

227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 새로운 인류입니다. 

아멘.  이 내용을 오늘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마이클 고힌이 이 부분을 잘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개인의 새로운 삶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 속에서의 삶이다.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연합은 또한 공동체적인 기독교 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포함한다.56”


그러면서도 그는 공동체성을 여전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구별된 개인이 그리스도 사역의 은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류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7장_선교적 교회에 대한신약의 이미지

319?


3. 교회는 새 창조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교회는 새 시대의 여명, 새 창조의 교두보,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발현입니다. 옛 시대 안에 드러난 새 시대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소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즉, 새 창조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성격만 보아도, 교회는 본질상 선교적입니다. 


또한 구원은 우주적 넓이를 갖습니다. 새 창조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해, 모든 창조세계를 다 포함할 만큼 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 창조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의 소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부분을 톰 라이트 박사가 요한복음 20장을 토대로 잘 설명합니다. 그는 요한복음 20장을 로마서 8장과 함께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이라고 말합니다. “매우 다른 문체와 양식으로 된 이 두 장은 아주 많은 복음을 풍성하고 빽빽하고 꽉꽉 눌러 넘치도록 담고 있기 때문에 때로 이 구절 외의 다른 구절은 영원히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이 요한복음 20장 도입부에 나오고, 그것이 나중에 다시 반복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반복할 때는 중요한 무언가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한복음 전체의 틀이 창세기 1장과 상응하도록 짜였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와 요한복음 모두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물론 그 태초는 그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여섯 번째 날, 곧 금요일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금요일에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 앞에서 세우고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금요일 저녁에 하나님은 창세기 1장 끝에서 모든 창조를 다 마치셨는데, 예수님은 금요일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버지가 창조 사역을 마치신 것처럼 아들도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그 뒤 일곱째 날 곧 토요일에 하나님은 안식하시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무덤 속에서 안식하시고, 그분의 사역은 완수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바로 그 다음!)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새번역) 무덤이 비어 있을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톰 라이트 박사는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복음은 이제 옛 주(week)가 끝났고, 바로 이 날,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의 첫 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고로 요한복음 전체의 틀이 창세기 1장과 상응하도록 짜였다는 톰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첫 날인 것은, 우리가 바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약성경 전체를 볼 때 명백한 사실입니다. 반면에 저는 그가 주장하는 틀에서 보면, 요한복음 20장이 말하는 바를 매우 생생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의 첫 날을 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21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따라서 이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서 첫 날을 여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1 우리의 소명에 대한 얼마나 생생한 표현입니까.


이에 대해 톰 라이트 박사는 그의 책     에서 잘 표현합니다.(페이지 찾을 것)


우리가 알듯이, 후기 근대주의 문화 속에서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부활절 이야기의 요점이 지난 주의 슬픔이 끝나고 행복한 결말을 제공하는 것이거나, 사후의 삶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일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수행할 교회 생활이나 증언과 훨씬 더 강하고 많은 관계가 있다. 그는 부활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의 시작이며,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완성된 창조 사역과 아들의 완성된 구속 사역은 결국 성령의 지속적인 선교 사역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19절(요한복음 20장) 이후 말씀의 핵심 내용이다. 


더 나아가 톰 라이트 박사가 제시하는, 초기 교회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부활 신앙으로부터 변형 중 하나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앞에서 1세기 당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사람들은 오직 유대인들뿐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톰 라이트 박사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신앙에서 일곱 가지 변형이 일관되게 일어나는 데, 그 일곱 가지 변형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역사적인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러한 변형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그가 제시한 다섯 번째 변형이 교회의 소명과 관련한 이 부분을 매우 잘 정리하고 있기에 여기에 인용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내용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초기 교회가 일관되게 믿었던 내용입니다.(책  이름과 페이지)2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고 마지막 날 최종적 부활에서 완성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 개인의 삶과 정치적 삶에서, 또 자신들의 사명과 거룩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취를 실행하고, 그럼으로써 최종적 부활을 기대하면 살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 그냥 하나님이 ‘종말’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만약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인격으로 친히 임한 종말이고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에 임한 그분이시라면,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고 믿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한 창조를 마치시니까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생령”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의 역사에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를 여시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의 동역자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소명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명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생생한 극적인 표현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을 모든 창조세계 세계 가운데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역자로 동참합니다. 


다시 톰 라이트 박사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이며, 젊었거나 늙었거나, 평신도이거나 성직자이거나, 어떤 전통에 서 있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다. 부활이 제시하는 믿음과 사랑의 메시지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와 함께 세상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낯설고 새로운 땅으로, 가능성과 도전으로 가득한 땅으로 우리 앞에 활짝 열린다. 제자들은 잠긴 방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창세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그분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 이 한 구절 안에 교회의 사명이 모두 담겨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소명의 범위 또한 모든 창조세계를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이 그렇고, 부활을 통한 새 창조세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의 첫날이 밝은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르심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삼중초청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을 올바로 이해할 때, 레슬리 뉴비긴이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을 삼중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은 참 잘한 것입니다. (1)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 (2) 세상을 위한 그분의 목적에 참여하는 것. (3) 이 인격적인 교제와 포괄적인 선교가 실재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


특히 그는 그가 “성경의 권위의 본질에 대한 가장 명확한 암시”라고 부르는 요한복음 15:15에 그 세 가지 초청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여기서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한 가장 완전한 계시를 체현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작은 제자들 공동체에 아버지와 그분의 목적을 계시하시면서 그들을 불러 자신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자신의 친구들이라 부르십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과업을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친구인데, 아버지가 하고 계시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이야기에 대해 뀌띔을 받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도록 벗들의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 초청은 그들을 믿음, 사랑, 순종으로 부릅니다. 그분과 함께 있어 그분을 알라는, 그분을 친구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선교에 함께하라는 소환입니다.


뉴비긴은 삼중초청에 대해서 말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에서 분리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20세기 교회에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가 분리되었다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복음에서 예수의 인격을 강조하지만, 그분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도외시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초청은 인격적 관계로 축소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초교파주의 전통은 하나님 나라 선교의 폭을 강조하면서 그에 따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쟁점들에 대한 관여를 강조했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도외시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는 그저 또 다른 사회 프로그램이나 정치 운동이 되었습니다. 뉴비긴에게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초청이고, 이는 그분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과 그분의 포괄적인 선교에 대한 값비싼 참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의 핵심. 선교적 교회의 삶.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역자로 동참하는 삶. 


마이클 고힌에 의하면, 뉴비긴의 삼중초청 주장의 배후에는 회심 개념에 대한 오랜 숙고가 있다고 합니다. 회심의 주제가 선교학 진영들에서 초미의 쟁점이었던 1960년대 동안, 뉴비긴은 회심의 본질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그 당시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전통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개인들의 인격적 차원을 강조했습니다. 초교파주의 전통의 관심은 회심의 사회적 차원들, 즉 공적 광장에서 경제.사회.정치 권력들과 벌이는 값비싼 교전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동방 정교회 전통은 둘 다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교회가 도외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회심은 교회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뉴비긴은 이 세 가지 관심사 모두에 대한 강력한 보증이 성경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뉴비긴에게 하나님의 초청은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따르고 그분과의 관계에 들어가도록 그리고 그분에게 우리의 충성을 바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초청은 값비쌉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예수의 선교에 함께하도록, 그분의 나라에 대항하는 권세들을 도전하는 일에 포괄적이고 값비싼 순종을 하도록 소환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초청은 공동체적입니다. 그것은 침(세)례를 받고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초청인데. 그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면서 그분을 아는 공동체이며, 그분의 선교에 참여하면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값비싼 순종을 나타내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발행된 초청장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복음 전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만약 우리의 복음 전도가 그 요청들을 약화시킨다면, 처음부터 타협하고 길들여진 교회를 낳을 것입니다. 마이클 고힌은 그러한 유형의 교회를 매우 잘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침(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며 성경을 읽고 열심인 사람들로, 교회 성장에는 헌신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라는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에는 철저한 순종으로 헌신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인 수가 늘어나는 성공적인 복음 전도가 있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교회는 ‘인종차별, 전투적인 분파주의, 그리고 강압적인 경제 및 정치 체제들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 같은 노골적인 악으로 얼룩진’ 상태에 머문다. 집단 회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개인적이고 가정에서 하는 행동’으로 축소되고 애석하게도 ‘공적 정의 같은 큰 사안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얄팍한 회심이 수반하는 숫자는 성공적인 복음 전도를 이루지 못한다. 게다가, 만약 복음 전도가 이기적이라면--즉 구원의 혜택을 누리도록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에 그친다면--또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선교를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교회를 만들어 낸다.”


반면에 교회의 선교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사역 전체는 분명하고 명백하게......선포와 징집의 사역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통치의 봉사를 위해 사람들을 정집하는 것이다.’ 선포는 듣는 이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에 지원하도록 요청한다. 이런 종류의 복음 전도가 처음부터 명백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선교에 대한 참여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여도 없다는 점이다.


설교는 여기까지. 

아래 나오는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참 중요. 

우리가 앞에서 매력적인 백성.  대안 사회.  하나님 나라의 표지 등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이 신약의 교회다. 아래 내용.  



그런데 그것이 포괄적 성격.  전 우주적인 성격.  

다가올 시대의 구원의 범위가 우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의 선교도 창조 영역만큼 넓어질 것이고, 문화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면서 문화의 공적 생활로 확산될 것이다.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의 보편적이고 미래적인 범위는 세상을 향한 급진적인 교회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우주적, 구속적 계획의 동반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42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이자 교두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다가오는 운명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모든 활동에 힘쓸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학적 결론은…… 창조된 질서와 기관들에 대한 활발한 소명과 선교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폴리테이아Politeia(도시의 공적 생활)의 세상에서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44를 강조한다.



모인 교회 뿐 아니라 흩어진 교회도

다음은 교회의 소명에 나오는 내용

우리가 지금까지 묘사한 두 주장 모두에서 밝혀야 할 중요한 핵심이 있다. 즉 새로운 존재로서의 교회도 새로운 사회 체제로서의 교회도,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서의 교회, 새로운 사회 체제로서의 교회) 이것이 뉴비긴의 해석자들 일부가 저지른 실수다. 내가 언급한 두 곳 모두에서, 이 새로운 존재 혹은 새로운 사회 체제는 공동체로 모인 교회의 삶에서만 아니라, 자신들의 다양한 부르심 가운데 흩어진 교회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새 창조의 첫 번째 싹들”로서의 교회에 대한 논의에서, 뉴비긴은 “세상을 위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참된 성격”은 “그 구성원들이 .. 그들의 세속 직장에서 제사장직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을 포함한다고 명백히 말한다. 그리고 훨씬 더 분명히, 그가 그리스도의 삶의 새로운 실재를 살아내도록 성령에 의해 가능하게 된 “공동체의 총체적인 삶”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은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사회의 세속적 삶에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인류다. 그들이 공동체로 함께 모여 있든지, 그들의 다양한 부르심들 가운데 흩어져 있든지 말이다. 매우 중요. 교회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인류.  둘째 아담. 새로운 인류의 시작. 그리고 여기에 정확하게 일터 사역이 포함된다. 





계속 그가 한 말은 몇 단락 읽어보겠습니다. 


“복음서 이야기에서 앞 부분에 일어난 일들을 잠시 되돌아보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장 가망 없는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경축하신다. 이제 그분이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려고 왔으니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빛이 되라고 도전하신다. 그분은 가장 낯선 방법, 곧 그분의 죽음을 통해 이기는 미래의 승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앞으로 지어질 새 성전을 암시하신다. 새 성전은 벽돌이나 회반죽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로 지어진다. 그분은 이런 일들과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


이제 그분이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하시고, 그것을 위대한 명령으로 바꾸신다. (위 하나하나가 중요.  십자가까지)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건물 안으로 끌어 모으거나 기금을 모으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나도 건물과 돈과 성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위해 하는 것이다. 이 사명은 우리가 다시 반복해 사복음서로 돌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놀랄 뿐 아니라, 기도와 성령을 통해 그 능력과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세상을 위해 예수님의 사람,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사람, 세상을 위한 용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잠긴 문이 없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결코 꺽이지 않는 사랑의 메시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들이 열려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고 말씀하신다. 엄숙하고 난해한 분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용서는 용서이며 단순한 용인이 아니기 때문에 용서는 죄와 폭력, 편견과 악의, 교만과 탐욕, 정욕,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움 창조세계를 망치고 타락시키는 어떤 것과의 결탁도 확고하게 거부한다. 엄밀히 말해 부활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왜곡하거나 해체하는 어떤 것도 그곳에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 최선의 것을 요구한다. 부모가 자녀의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쉬지 않듯이 하나님도 새로운 창조세계 안에 죄의 질병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손상시키는 데 일조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십자가 아래 이런 것들을 버릴 수 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와 함께 우리는 스스로 용서를 맛보고, 용서를 위대한 희년 메시지, 결국에는 소망의 메시지로 세상에 제시하라고 요청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그의 말.  톰 라이트.  

예수님은 나와 당신이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창조세계의 사람이 되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표지와 상징을 만들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의미)는 우리가 지금 시대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표지를 만들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많이 쓰이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 그리스도의 몸.  무엇보다 선교적.  선교적.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과 교회와의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내포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핵심적인 의미는 결국 선교적이다.

바울은 “새로운 인류를 자신 안에서 창조하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 2:15-16). 우리는 이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로’돌아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려는 목적이 실제로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형성은 성경 이야기의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사역을 열방에 빛이 되는 일에 실패한 백성을 모으고 회복하는 것이며 , 이 참된 종말론적 이스라엘에게로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이 일을 성취하셨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목적은 성취되었다. 그분은 이제 살아 계셔서 그들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지속하도록 성령을 통해 자신의 삶을 나누어 주신다. 이 성경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세상을 위해 그분의 삶을 구현하는 선교적 백성을 창조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동일시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다. 교회는 지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 manifestation이다. 60

7장』선교적 교회에 대한신약의 이미지

325



이 부분을 잘 보여주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의 방대한 교회 이미지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이미지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교회의 종말론적인 본질에 대해 풍성하고 정확한 정의를 제공하는 “교회에 대한 신약적 사고의 가장 성숙한 결과”47를 갖고 있다. 


이 표현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와 친교”49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하나됨과 친교를 반영하지만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다.50 신약의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이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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